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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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36)
2011년 03월 28일 08시 22분  조회:3203  추천:15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36)

        모택동비서 전가영의 자살진상  

전가영(田家英)은 한때 모택동이 제일 맘들어하고 제일 신임한 비서였다. 그런 그가 력사에 류례가 없는 “문화대혁명”때 살길이 막혀 자살하고말았다. 무엇 때문에?.... 
     

(1). 당년에 모택동이 제일 맘들어한 전가영.
    

1942년 1월 8일, 전가영은 <<해방일보>>에 <<후방부터 말하자>>라는 잡문을 발표했는데 모택동의 호평을 받았다. 모택동은 일부러 그를 찾아 담화를 했다. 1948년, 호교목의 추천을 받아 전가영은 모택동의 비서로 되었는데 1966년에 죽을 때 까지 옹근 18년간을 모택동의 신변에서 사업한것이다. 
전가영은 뼈속까지 서생기가 푹 배인 사람이였다. 오래동안 모택동의 신변에서 비서노릇을 했기에 국가와 당내의 핵심기밀을 아는 것이 많았던  그는 자기가 이제는 정치계에서 몸을 뺄 수도 숨길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거니와 영욕(榮辱)을 받아내기 어렵다는 것도 잘알고 있었다. 기복을 이루는 풍운에 따라서 처사한다면 넘어가지는 않을 수 있으련만 그의 그 대바른 정직과 강렬한 애증이 그가 그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여 그는 “문화대혁명”의 첫충격에 그만 자살하고 만 것이다.    

전가영이 여러방면으로 비서사업을 잘했기에 모택동은 마음에 들어 칭찬을 몹시했다. 중공8차전국대표대회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모택동이 개막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의 발언고를 장춘교가 썼던 것이다. 그런데 발언고가 길거니와 내용이 제목과 거리가 멀어 모택동은 그 글을 쓰지 않았다. 회의 기일이 박두하여 조급했던 모택동은 전가영보고 쓰라했다. 하여 전가영이 필을 들었는데 그는 하루밤사이에 써냈던 것이다. 모택동은 그것을 류소기, 주은래, 주덕에게 보여 수개한 후 채용했다. 모택동이 한 그 개막사에는 이런 말 한 구절이 있었다. 
   
“사람은 허심하면 진보하고 교오하면 락후하게 된다.”            
   
이 말은 인차 널리퍼지게 되였고 영향이 매우좋았다. 
       
회의쉼참에 한 대표가 모택동을 찾아와서 개막사가 짧고도 힘이 있거니와 인심을 사뭇 격동케 하니 참 좋다고 했다. 
   
그러자 모택동은 자랑스레 말했다.
    
“그건 내가 쓴게 아니고 한 소장파가 쓴 것이요. 이름이 전가영인데 바로 나의 비서요.”
    
막후영웅은 이렇게 출현 된 것이다. 
   

전세기 60년대초에 전가영은 모택동에게 자기가 보기에는 허다한 농촌간부들이 사업할줄을 잘 모르니 응당 농촌공작조례를 만들어야 할게 아닌가고 건의했다. 
   모
택동은 전가영의 건의를 접수했다. 그리하여 <<농촌인민공사공작조례(초안)>> 즉 농촌공작 “60조”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것은 “대약진”운동이래 발생한 좌경착오를 규정함에 매무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던것이다. 
  
 “ ‘60조’발명자는 전가영이다.”
    
모택동은 이같이 승인했다.
    
그 외에도 전가영은 백성들이 써올린 편지를 처리하면서 조사연구에 심입해서 실제정황을 료해하였기에 모두 아주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에 대한 모택동의 평가는 자연히 좋기마련이였다.
    
1958년, 중공중앙은 간부들이 하방(下放)할것을 호소했다. 어떤 성위서기는 모택동에게 전가영을 자기들이 있는 곳으로 하방시킬것을 요구했지만 모택동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나는 간부가 하방할 것을 주장하지만 전가영만은 하방시키지 않는다. 이 문제만은 내가 언행이 같지 않은 것이다.”
       

(2). 렬흔이 생기기 시작. 
          

전가영이 모택동을 존경하고 숭배는 했지만 그의 머리는 맑게 깨여있었기에 맹목적인 숭배로 신을 만들어내는 그따위 운동에는 전혀 말려들지 않은것이다.
전가영은 모택동의 신변에서 사업을 오래했기에 그에 대한 료해가  그 누구보다 깊었는바 그의 장점과 결점을 잘 알고있었던 것이다.
전세기 50년대부터 전가영은 모택동의 일련의 방침에 대해서 의심하면서 모택동이란 이 위인을 비평도 했다.
로산회의전기에 전가영(田家英)은 호교목(胡喬木), 리예(李銳) 등과 같이 “좌”적인 것을 반대했고 팽덕회, 장문천, 주소주 등의 언론을 지지한다고 명확하게 표시했던 것이다. 
 
로산에서 전가영은 지어 자기가 중남해를 떠나갈 때면 모택동에게 제출할 의견 세가지를 준비해두고있노라고 말까지 했다.
    
첫째, 천하를 다스리기는 해도 좌우를 다스릴줄은 모른다.
 둘째, 백년후에 다른 사람이 자기를 의론할까봐 무서워한다. 셋째, 비평을 듣지 않으니 누구든 속심말을 하려하지 않는다. 
오늘와 보면 그의 그 말들은 과연 원견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있다.
후에 로산회의는 풍향이 획 돌아져 감히 속심말을 했던 팽덕회는 불공정하게 비판을 받았고 전가영도 따라서 어떤 말들은 “우경”영향이라고 적발되였던 것이다. 그런것을 모택동이 나서서 그를 보호했기에 그 고개를 무사히 넘기였다.
하지만 사상상의 렬흔은 이때부터 심해졋던 것이다. 
 전가영은 여러차례나 기층에 심입하여 조사연구했는데 실사구시적이였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가 그같이 현실을 조사하여 얻은 결론이 모택동의 견해와는 달라서 그와 분기가 생기군 했다. 대바른 그는 자기의 견해와 의견을 굽히면서 그를 붙쫓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7천명대회가 있은 후에 전가영은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호남의 몇곳에 가서 농촌실태를 조사했다. 모택동의 본의는 “60조”를 수개하자는 것이였다. 
   
전가영은 조사를 통해 여러 농촌들에서 호도거리를 하자는 목소리가 높거니와 박절하다는 것을 알아냈던 것이다. 그는 북경에 돌아오자 상술한 정황을 류소기에게 회보했다. 류소기도 호도거리를 하면 과연 농민들의 생산적극성을 높일 수 있겠다면서 찬동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가영을 통해 자기의 견해를 모택동에게 반영하게 했다.
한데 모택동이 자기는 그러는 것을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적인 조사로부터 결론을 내려 인식을 굳힌 전가영은 모택동의 의견에 굴종하지 않았다. 그는 류소기와 등소평의 지시에 따라 중공중앙이 기초한 <<농업생산을 회복하는 10대정책>>을 만들어내였거니와 정책을 계속 넓혀야지 “단칼”에 잘라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모택동은 이 일을 알자 고치라는 “60조”는 고칠 념을 하지 않고 무슨놈의 호도거리고 밭을 나눈단말인가고 화를 내면서 엄히 비평했다. 그는 중공8기10중전회에서도 여러번이나 이름을 찍어가면서 전가영을 비평했다. 모택동은 “단깐풍”은 바로 수정주의로선의 중요한 표현이라면서 이 원칙적인 문제에 들어가서는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으려했다. 
   
류소기가 회의에서 전가영을 찬양하는 말을 몇마디해서야 긴장해진 분위기가 좀 풀리였다.   
   
전가영은 모택동앞에서 자아검사를 했다. 하지만 로산회의때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착오”를 검사했을 뿐 다른 사람은 절대거들지 않고 모든 책임을 자기가 안았던 것이다. 
    
 
3.심임을 잃다

1963년 5월, 모택동의 장악하에 <<중공중앙의 당전 농촌공작중의 약간한 문제의 결정에 관하여>>, 즉 “전10조”를 만들때는 전가영을 찾지 않았다. 
   
그해의 9월에 류소기의 장악하에 <<농촌사회주의운동중의 일련의 구체적인 정책결정에 관하여>>(“후10조”초안)를 만들때는 류소기의 요청에 의하여 전가영이 참가하였던 것이다.
상술한 그 두 문건의 차이가 두 주석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였다. 전가영은 모택동사상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전가영의 서생기, 전가영의 정직함은 <<해서의 파직>>에 대한 평가에서 남김없이 드러냈던것이다. 
   
강청이 모택동에게 오함의 <<해서의 파직>>은 문제가 있다면서 비판하자고 하니 모택동이 전가영보고 <<해서의 파직>>을 한번 읽어보라고  하면서 다 읽은 후에는 견해를 말하라했던 것이다. 전가영은 극본을 읽고나서 강청의 설법과는 전혀 다르게 자기는 <<해서의 파직>>에서 그 어떠한 음모도 찾아보지 못했노라고 모주석께 보고했다. 
   
1965년 가을에 요문원이 <<해서의 파직>>을 비판한 문장이 발표된 후 12월 21일에 모택동은 항주에서 진백달, 전가영, 호승(胡繩), 관봉(關鋒) 등을 불러 담화했다. 
   
모택동이 말했다. 
   
“척본우의 문장이 좋아서 내가 세 번이나 읽어봤는데 결점은 이름을 찍지 않은 것이다. 요문원의 문장역시 매우좋다. 연극계, 력사계, 철학계에 대한 진동이 큰것이다. 결함은 요해처를 때리지 못한 것이다. <<해서의 파직>>은 요해가 ‘파직’인 것이다. 가경황제가 해서를 파직시키고 1959년에 우리가 팽덕회를 파직시킨 것이다. 팽덕회역시 해서인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모두 깜짝놀랬다. 
   
바람따라 돗을 올리기를 잘하는 진백달은 강청을 찾아가 모택동이 한 말의 “요해”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한편 전가영은 모택동이 항주에서 담화한 것을 정리할적에 일부러 이 부분의 론술을 빼버려 오함과 팽덕회를 보호했다. 강청과 진백달은 이 일을 틀어쥐고 놓지 않으면서 전가영에게 모택동의 저작을 뜯어고쳤다는 죄명을 씌워 박해했다.
전가영은 <<해서의 파직>>으로 인해 강청의 미움을 샀거니와 “최고봉”리론과 “최고의 최고 말”따위를 반박한 것 으로 하여  림표의 노여움까지 샀던 것이다. 
   

1965년 6월 29일의 일이다. 라서경이 유관인원들을 모여놓고 총정치부에서 편집인쇄한 <<모주석어록>>재판 머리말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를 내놓았던 것이다. 머리말에 림표가 “발명”해 낸 모택동사상은 “최고의 최고말”인바 당대맑스주의 “절정”이라 했던 것이다. 라서경은 여기에 대해 자기의 견해가 따로 있었기에 그렇게 쓰는 것을 동의하지 않으면서 당장에서 전화를 걸어 리론수평이 가장높다고 생각하는 전가영에게 물었던 것이다. 전가영은 “최고의최고”라는 제기법자체가 있을 수 없는것이다, 리해되지 않거니와 번역할 수도 없다. “최고의 최고”라면 일후에는  더 발전할 수 없다는게 아닌가고 반박했다. “절정”이라는 말도 과학적이 못된다, 맑스주의가 더는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고뭔가 했다. 
   

라서경을 비판하면서 이 말이 적발되여 나왔길래 전가영에게는 “모택동을 반대했다”는 죄가 가첨된 것이다. 
   

진백달은 정치야심이 있어서 당내에서 지위가 오를수록 욕심이 더 팽창했다. 그는 늘 전가영에게 모주석이 근일에는 무슨 책을 보느냐 어떤 말들을 하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전가영은 그의 이따위 비위를 맞추는 행위에 반감이 생겨 공개적으로 경멸했다. 또 다른 하가지, 진백달과 전가영은 각각 중앙정치연구실의 주임과 부주임을 맡았던 것이다. 그런데 진백달은 연구실의 사업을 경상적으로 하지 않았다. 하기에 전가영이 혼자 애써서 해나갔는데 진백달은 되려 전가영이 제 직권범위를 넘어섯다고 무함했다. 전가영은 이러한 모욕적인 무함을 받고 참을래야참을 수 없어서 그와 당면에서 내놓고 따졌다.
그래서 진백달은 전가영을 더 적대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소가 합치여 전가영의 비극적인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4). 비분자살

1966년 5월에 열린 정치국확대회의에서 팽진, 라서경, 륙정일, 양상곤을 비판할적에 전가영도 역시 비판대상에 들어 사업을 정지하고 반성하게 되었다. 
   
5월 22일 오후 3시, 중남해의 거주지에서 안자문(安子文)이 와서 중앙의 결정을 선포했다.
   
 제1, 중앙은 너와 양상곤의 관계가 불정상이라 인정한다. 양상곤은 이미 반당반사회주의라고 인정한 것이니 너도 검사해야 한다. 
   
제2, 중앙은 네가 일관적으로 우경이였다고 인정한다. 나는 중앙을 대표하여 선포한다. 너는 곧 직을 정지하고 반성할 것, 네가 보관하고있던 자료들은 전부 바칠 것, 래일 중남해에서 나갈 것, 비서실사업은 척본우가 책임진다.
       

그날 밤 중앙판공청의 간부회의에서 전가영을 비판할적에 그에게 또 한가지 “모주석의 저작을 고쳤다”는 죄가 덮씌워졌다. 이 관은 도무지 넘길 수 없는 것이였다! 
   
이날밤의 회의는 이미 퍽 늦어서야 끝났던 것이다. 전가영은 밤을 새우면서 문건들을 정리했다. 비분이 끓어넘친 그는 제 처와 말했다.
    
“내 문제는 강청과 진백달이 무함한거요. ‘죄는 지은대로 가고 덕은 닥은대로 간다’고 두고보오만 그것들이 아무 때건 좋은 끝장이 없을거요!”   
   
이때 전화벨이 급촉하게 울리였다. 귀를 아프게 자극하는 소리였다. 
   
척본우가 오만스레 공작을 넘겨받는 수속을 해야겠다는 것이였다. 
   
척본우는 본래 전가영의 수하인원으로서 중공중앙의 판공청에서 신방공작(信訪工作)을 한건데 조사보고를 한번 쓴것이 모택동의 주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때부터 어깨가 으쓱해진 척본우가 지금은 전가영의 자리에 올랐으니 득의연할 수 밖에!  
   
노기가 사무친 전가영은 그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화통을 메치였다.
    
“저깟게 다 뭐길래. 강청의 졸개질이나 할 너석, 내가 가서 서명을 하라구? 하지 않을테다!”
    

전가영은 5월 23일 오전에 목을 매여 자살하는 것으로 항쟁했다. 
   그때 나이 44살.       
 “당은 아무 때건 내 문제를 밝혀줄 것이다. 원한이 바다밑에 깔려이게는 하지 않을것이다.”
    
그가 죽기전에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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